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펠로폰네소스 전쟁 (문단 편집) === 초기 전개(기원전 432~기원전 427) === 전쟁의 시작은 테베의 플라타이아 기습 공격에서 시작되었다. 테베는 오랫동안 플라타이아를 점령하고자 노력했지만 매번 실패해 왔는데, 동맹인 스파르타가 전쟁을 결의하자 다시 시도했다. 테베는 플라타이아이를 포위하였고 플라타이아이는 아테네로 구원군을 요청하고 결사항전한다. 허나 아테네의 구원군은 늦어졌고 플라타이아이는 함락되고 말았다. 함락 후 테베군과 스파르타군이 시내에 진주하자 플라타이아이 시민들의 처리를 둘러싸고 논쟁이 크게 벌어졌는데, 테베와 플라타이아이가 서로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스파르타가 결정하는 구도였다. 플라타이아이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에 빌붙었던 테베를 비꼬면서) 자신들은 신의를 지키는 국가였고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 당시 자신들을 도와줬던 걸 잊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항복할 수 없었노라고 자신들을 변호했다. 이에 테베는 신의를 저버린 것은 네놈들을 말하는 것이라며 (테베는 플라타이아이의 모도시) 플라타이아이 주민들을 전부 죽이라고 요구했다. 결국 스파르타는 전부 죽이되 우리에게 도움을 줬던 전력이 있었던 사람들은 살려준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대부분 플라타이아이 시민들은 처형당하고 말았다. 아테네는 포위 직전에 혹은 포위를 뚫고 도망치는데 성공한 플라타이아인들을 수용하여 보호했다. 이후의 전투들은 스파르타와 아테네 양쪽 모두 결정적인 승기를 가져가지 못하는 채로 진행되었다. 애초부터 무적에 가까운 지상군을 가진 스파르타와 지중해 최강의 해군을 보유한 아테네의 상성이 서로에게 최악이라, 스파르타는 바다로 함부로 나가지 못했고 아테네는 지상전을 회피하였기 때문이다.[* 비유를 하자면 한국군 vs 일본 자위대의 구도와 비슷하다 볼 수 있다. 다만 위에 적힌 건 통념이고, 많은 인구의 아테네 육군이나 페르시아의 자금지원을 받은 스파르타 해군 등도 강성했다.] 스파르타는 거의 매년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의 대군까지 모아서는 정기적으로 아테네가 있는 아티카 반도로 레이드를 뜨러왔다. 그러나 아테네는 육지에서 강력한 스파르타군을 상대하려고 하지 않았고, 이에 스파르타는 아테네 인근 농지를 유린하고 황폐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이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반복적인 공격으로도 쉽사리 황폐화되지 않았다.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의 자생력은 상상을 초월하게 강한 데다가 숫자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1차 침입 당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은 약 6만에 달하여 당시 그리스 세계로서는 놀라운 숫자였으나, 빅터 데이비스 핸슨이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추산한 바에 따르면 그럼에도 아티카의 농장을 완파하기 위해서 병사 1인당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 205그루 이상을 망가트려야 했다. 대략 세 번째 침공 때는 이전에 훼손했던 나무들이 다시 자라나는 중이라 그것들을 파괴하다 왔다는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까지 그리스의 전통에서 시민군이 생업을 떠나 복무를 하는 기간은 몇십 일 정도로 제한적 것이었고, 특히 스파르타의 경우 숫적으로 우세한 헤일로타이(스파르타의 국유 노예)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감시해야 했기 때문에 더더욱 본진을 오래 비울 수 없었다. 그래서 스파르타군의 아티카 원정은 가장 길었을 때도 고작 40일 정도에 불과했다. 한편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시민들을 설득하여, 스파르타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모든 농민을 아테네 성벽 안으로 피신시키고 대신 델로스 동맹의 함대를 대규모로 동원하여 펠로폰네소스의 해안지역을 유린하기로 하는 전략을 세웠다. 비록 스파르타군이 아테네 주변의 농지를 약탈했지만, 강력한 아테네 해군이 해운을 통한 식량 공급선을 지켜주었고, 또한 항구에서 하역된 식료품은 항구부터 아테네시까지 세워진 장벽을 따라 안전하게 운반되었기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초토화 작전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이때는 성벽을 공략하는 공성 전술의 발전이 미비해서, 아테네쯤 되는 부국이 작정하고 세운 성벽을 공략하자니 답이 안 나와서 약탈하다가 돌아감이 한계였다. 그러나 많은 인구가 좁은 시내로 몰리자 위생 상태와 영양 상태가 모두 안좋아지면서, 기원전 430년부터 아테네에 수차례 [[범유행전염병|대역병]]이 돌았다.[* 이 병은 소위 아테네 역병이라고 불린다. [[http://podor.egloos.com/v/1327762|참고]] 정체는 불분명한데 집단 무덤을 조사한 학자들은 [[티푸스]]로 추측하고, 이외에도 [[장티푸스]], [[천연두]], [[탄저병]] 등 다른 여러 질병들도 후보군에 올랐다. 대강 한 종류의 전염병뿐만이 아니라 서른 가지쯤 되는 다양한 전염병이 아테네를 강타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증상으로는 고열, 기침, 구토, 구토 반복 후 공복 상태의 [[위경련]], 기력 저하, 재채기와 기침, 출혈과 구취로 이어지는 [[인후염]], 음성 상실, 극도의 갈증, 나은 후에도 이어지는 실명 등의 후유증 등이 있었다. 아테네 역병의 창궐 시기를 저술한 투키디데스도 해당 시기에 이 역병을 앓았다가 살아남았으며 다른 사람들이 역병에 걸려서 어떻게 죽어가고, 역병 창궐 동안 아테네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직접 체험했기에 그 기록을 현장에서 담아서 후대에 남겼다.] 이 결과 아테네는 주민의 1/3 가까이(대략 7~8만 명)를[* 학자에 따라 2/3까지도 추정하기도 한다.] 상실하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기원전 429년 역병에서는 지도자 [[페리클레스]]마저 잃었다. 이뿐만 아니라 전쟁의 교착상태가 지속되면서 아테네의 재정상황도 점차 영 좋지 않게 되었다. 비록 역병과 재정문제로 인해 아테네 해군의 규모도 축소되었지만, 숙련된 아테네 함대는 기원전 429년 나우팍투스 해전에서 40척 대 77척의 숫적인 열세에서도 대승을 거두는 등, 바다에서 활개를 치고 다녔다. 한편 페리클레스가 역병으로 죽은 이후 아테네의 정권은 급진적인 주전파인 클레온에게 넘어갔고, 이제 아테네의 전략은 보다 적극적으로 바뀌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